https://youtu.be/bSvAznI418k?si=f4vlwAG-toiL5j_6
https://youtu.be/LdSYLNPdDYk?si=533OIHXRIKwicnH-
글 정리 공부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는 10, 20, 30년대로 나눠서 하나씩. 특히 국내외 국외에 따른 구분이 있다.
대략적인 정보를 확인하고 넘어가자.
1910년대. 10년대 일본의 정책은 “무단정치”이다 이는 강제병합한 이 상황에서 폭압적인 힘으로 일단 민중들을 누르는 정책이다. 특히 1905년 통감이 부임되었다가 1910 경술국치때는 총독이 부임하는데. 이는 오로지 군인만 부임이 가능했던 위치였기에 무단정치의 성격이 강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총독을 돕는 곳이 ‘중추원’이었고 조선의 친일세력들이 모여서 역사까지 왜곡했다.
또한 이때 헌병경찰이 투입되어 즉결처분권까지 가지고 태형을 실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정치로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금지당했으며 학교에는 심지어 칼을 찬 교사가 수업을 했다. 심지어 조선의 학생들은 학제를 4년, 일본 학생들은 6년으로. 태형과 함께 노골적인 조선인 차별을 실시한다.
경제는 제일 먼저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한다. ~부터 ~까지 신고를 해야하는데(신고, 증거), 이것이 안이뤄지면 그냥 땅을 빼앗아버리며 토지를 몰수한다. 또한 조선에 있던 경작권(땅의 주인이 아니라 농작물만 키워서 서로 가지는 권리)가 부정당하여 계약제로 변환되어 이는 계약제 농민이 증가한다.
이때 ~령이라는 이름을 많이 만들어서 실시하는데, 이때는 회사령이 가장 유명하다. 회사령이란, 회사를 세울 때 총독부에 허가를 받으라는 것인데, 이는 철저히 총독부가 민족자본을 통제하기 시작하는 단계이다.
이렇게 민족 자본과 무단통치 때문에 1919년 3·1운동이 전개된다.
1920년대. 20년대 일본은 3·1 운동맛을 보고 문화통치로 방향을 살짝 바꾼다.
일단 총독은 기존에 군인만이 부임가능했으나, 이제는 문관도 가능하게 바꿨으며, 자치적인 도평의회와 부·면 협의회등을 실시하게 허가.
또한 헌병경찰에서 일반경찰로 바뀌었으며 태형이 폐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허가, 2차 교육령으로 학제를 통일하는 등의 개선이 이뤄졌으나 철저한 기만 정책이다.
일단 총독은 저렇게 바꿔도 결국 군인만 부임했고, 자치의회들은 모두 친일파만 허가했으며.
이러한 정책이 민족의 분열을 키우고 조선사편수회로 ‘조선인은 게으르다’등의 이론과 역사를 왜곡했다.
일반경찰로 바꿨으나 수가 많아지며, 치안유지법(1926)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내었다.
또한 신문은 검열하고, 학제를 통일하는 대신 경성제국대학을 세우는 모습.
경제는 토지정리가 끝났기에 본격적인 생산량을 늘리고 수탈계획을 세운다.
생산량을 늘리기 위한 산미증산계획이 이뤄지는데, 이는 일본 본토의 농민들이 ‘노동자’로 바뀌며 농사를 할 사람이 없어진 상황. 그렇기에 부족해진 쌀을 조선에서 빼앗아간다. 문제는 수탈하려는 목표량이 생산량보다 많다는 점. 일본은 만주에서 값싼 잡곡들을 수입해 농민들을 먹이고 쌀은 가져가버린다.
개량, 개간, 증자, 수리시설들을 이렇게 만들면서 비용은 전부 농민에게 전가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그래서 다 필요없고 쌀만 재배하는 단직화, 상품화가 진행된다.
여기에 일본자본이 한국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제 회사령을 없앨 차례가 왔고, 실제로 폐지하여 일본기업들이 조선에 들어오게 된다. 이로써 완전히 민족자본이 부족해지고 이는 “물산장려운동”으로 전개된다.
1930년대.
이때부터 급격히 일본의 정책이 바뀌는데, 일본은 1929년 대공황을 물자를 마구 쓸수 있는 ‘전쟁’으로 풀어내려고 한다.
[31년 만주사변, 37년 중일전쟁, 41년 태평양전쟁] 때문에 일본은 조선과 조선인을 전쟁에 가져다 쓰기위해 온갖 것들을 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전쟁에서 뒤통수 안맞으려면 철저히 세뇌를 시켜야한다는 마인드이다. 이것이 민족말살통치이다.
창씨개명, 황족 신민 서사 암송, 신사참배, 금성요배(시간에 천황 쪽에 절).
청구학회_역사왜곡단체. 이는 신채호과 백남운이 저항한다.
사상범 보호 관찰령, 사상범 예방 구급령으로 독립운동가 탄압, 신문 폐간 그리고
조선어금지 (조선어 학회 사건, 42), 국민 학교령(41)
이렇게 전방위적으로 일본인화를 시키려고 한다.
경제는 다 탈탈 털어간다. 현재 농촌이 박살난 상태이다. 때문에 농촌진흥운동(30~40년대)을 실시하지만 의미는 없었다고 한다. 또한 남면북양 정책_남쪽에는 면화, 북쪽에는 양을 키워서 면직물을 수탈하려고, 실시한다.
본격적인 병참기지화 정책. 전쟁이 절정일 때 군수공장화를 목표로 하고.
그러던 중 1938년. 국가총동원법이 실시되어 사람들은 징용, 징병, 정신대(노동자), 위안부. 물건은 끊임없는 공출(쇠, 가죽, 수저등 싹)과 배급 사회로 바뀌게 된다.
일제강점기 독립활동
1910년대 저항에서 시작. 헌병경찰의 무단통치시기라서 대부분 비밀결사체제로 국내활동을 실시한다.
반면에 국외는 나름대로 이후 한반도독립을 위해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중이다.
먼저 한말 만들어진 신민회. 애국계몽단체인 신민회는 경술국치 직후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인해 유죄가 내려져 싹 잡혀서 와해가 된다. 결국 신민회 일부는 국외로 넘어가 독립운동기지에 들어가는데.
신문회 이후 비밀결사 (국내)
독립의군부(전라도 지역) : 이 지역의 의병활동은 위정척사파의 기반되어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들이다. 여기에 임병찬 같은 사람들이 고종에게 명형을 받아 활동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이 복벽주의(고종을 왕으로 다시 추대하자)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권반환 요구서 제출들도 시도한다.
대한광복회(대구지역) : 이 지역의 의병활동은 박상진이 이끌며, 공화정을 지향한다. 공화정을 지향한다는 것은 독립의군부와는 다르게 과거(고종)가 아닌 미래로 발전하자는 의미로 방향성이 다르다.
이후 잡혀서 처형당하고 마는데 이들은 의열단의 전신으로써 친일부호 암살, 민족사관학교등을 건설한다.
비밀결사 (국외)

서간도 : 신민회 회원들 일부가 서간도로 옮기고 가장 먼저 지은 것이 학교(경학사)였다. 이것을 지원한 이회형, 이상룡이 있었으며 이후에는 “신흥강습학교”도 짓는다. 더 이후에는 ‘서로군정서’를.
북간도 : 명동학교 (김약연), 특히 대종교(단군)가 중심으로 만든 조직 “중광단”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서전서숙(이상선), 중광단이 후원한 조직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성서’가 있었다.
또한 청산리대첩의 주역부대인 홍범도 장군님의 ‘대한독립군’이 있었다.
연해주 : 연해주는 새로운 한민들이 사는 동네 (신한촌)을 구성하였다. 여기서 최재형은 안중근의 모든 자금을 대주며 지원을 지속한다. 또한 신한촌에서 권업회를 만들기도 한다.
대한 광복군 정부가 (이상설)들어서고 이후 이곳에 대한국민의회가 들어선다
미국 본토 : 미국본토는 안창호 중심으로 대한인국민회가 스티븐스를 저격한 ‘장인환’ ‘전명운’을 구명하여 돌아오게 한다.
하와이 : 박용만 중심으로 대조선 국민군단을 만들고
멕시코 : 멕시코에서는 숭무학교가 이근영을 중심으로 군인들을 양성한다.
이 부분 매우 헷갈리는데 중요하다.
아무튼 이런 와중 세계 1차대전 (1914~1918)이 끝나고 파리 강화회의가 열리며 미대통령 윌슨은 ‘민족 자결주의’를 주장한다.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에 해당되는 식민지들의 미래는 자기들의 손으로 결정하라는 논리였고, 우리는 포함안되지만 뭔가 해야하지 않겠나하여 아래의 운동들이 실시된다.
대동 간결선언(17, 상하이)
대한 독립선언(19, 만주)
2·8 독립선언(19, 도쿄)
3·1 운동 (민주주의운동의 성향)
이 3·1 운동은 민족대표 33인(천도교, 개신교, 불교포함)들이 모여 계획했으며, 비폭력으로 계획했다.
고종의 인산일(장례식)이었어서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며 초기에는 비폭력이 실천되었지만 일본 경찰의 강경한 진압으로 폭력으로 변하게 된다.
이것을 당한 일본은 분노하여 제암리 교회·고주리 학살을 자행한다. 이를 스코필드가 외국에 알린다.
= 결국 이 영향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세울 수 있게 된다. (1919.4.11.)
기존 다양한 의회와 회들이 있었다. 한가지 정리할 것은
서간도 : 신흥강습학교(신흥강습소_신민회를 이었기에 1911), 서로군정서(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후)
북간도 : 명동학교 (1908), 북로군성서(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후)
연해주 : 대한광복군정부(1911~1917로 활동해체 후 대한국민의회), 대한국민의회는 (1919.3)으로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통합된다.
이렇듯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와 한성정부가 모두 통합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진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 임시정부가 세워지고, 최초의 3권 분립이 이뤄진다. 이는 임시의정원(이동녕_초대의장)이 국회와 입법을, 법원이 사법, 국무원이 행정을 한다.
2. 공화정 체제이며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
3. 연통제와 교통국(이륭양행회사)으로 행정조직과 정보기관을 설립.
4. 운영을 위한 자금으로 안희제가 사장인 백산상회에서 도움을 주었다. 특히 이를 경주 최부자가 도왔다.
5. 독립신문, 임시사료편찬, 구미위원부(미국 활동) 활동을 진행한다.
이런 것들을 이제 일제가 통제하기 시작하며
너무 힘들어져서 “앞으로 어디로 가야하는가” 라는 1923년 국민대표회의를 열게 된다.
이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신채호_임시정부해체 + 새 정부수립), 개조파(안창호_임시정부의 제도 명칭 변경)으로 나뉘어 이야기를 하지만 결론이 나지 않고 많은 이들이 이탈하게 됨.
25년. 그러면서 이승만이 임시정부에서 탄핵당하고 박은식이 대통령이 된다. 국무령(의원내각제)로 변경.
27년. 사람이 없어져서 국무위원 집단 지도 체제로 바뀐다.
31년. 임시정부를 마지막까지 지킨 김구가 ‘한인 애국단’을 설립하여 이봉창(일왕, 도쿄)과 윤봉길(일왕, 상하이 홍커우)를 모집하여 독립운동을 한다.
40년. 상하이에서 폭탄을 던졌기에 영향이 온다. 위치를 옮길 수 밖에 없게 되고, 충칭에 정착하게 된다. 주석은 김구로, 정부여당으로 한국독립당을 만들고 산하군대(한국광복군_지청천)이 생긴다.
41년. 일제의 패망이 보이기 시작하여 건국강령(삼군주의_개인간 민족간 국가간 균등)이 발표되고 선전포고까지 이뤄진다.
42년. 김원봉과 조선의용대가 합류한다.
43년. 제 2차 세계대전에 영국의 요청으로 인도·미얀마 전선에 투입된다.
44년. 주석·부주석의 추가와 개헌.
45년. 미국 OSS부대와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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