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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qNmqzPOssek?si=BB2xM8W_6jlupVnm
글 정리 공부
조선의 경제
토지제도 : 파트의 의미는 전근대 공무원들은 어떤 토지를 어떻게 받았나? 에 대한 것이다.
고려말 공양왕 때 시작된 과전법, 이후 위화도 회군으로 과전법을 시행하고 이때 과전법은 경기도에 한해 받고 있었다. 전현직 관리들이 이 경기도의 땅을 받는데 기본적으로 세습은 불가하였다. 하지만 수신전(땅을 받은 관리가 죽더라도 아내가 결혼하지 아니하면 아내에게 상속된다.)와 휼양전(관리가 죽더라도 자식에게 상속)등으로 인해 땅이 회수되어지지 않자 이 전직 공무원을 제외하고 수신전과 휼양전을 삭제한 “직전법” (세조)을 시행한다. 그럼 뽕뽑기 위해 현직에 있을 때 많이 뜯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중간에 관청을 껴서 관청이 전달해주는 ’관수관청(관수관급제)‘이 시행되기도 했다.
이후 결국 직전법을 삭제하여 (명종), 녹봉을 전면적으로 실시하고 수조권을 폐지, 이렇게 명종 시절 수조권이라는 개념이 삭제되었다.
조세제도 : 과전법은 위의 토지제도 뿐 아니라 백성이 내는 세금의 원칙까지 포함한 법이다.
이본에는 백성을 위주로 보면 초기에는 대략 1/10세 (공양왕)이었지만 세종때 “공법”으로 바뀌며 세금을 걷는 기준을 세분화하였다. 비옥도(전분 6등법)과 흉작(연분 9등법)을 기준으로 하였다. 세금을 합리적으로 걷게 하여 최대폭이 줄지는 않고 오히려 늘기도 하였다. 16세기에는 관행적으로 변해서 최저세율로 걷었다.
이외에도 지대, 공납, 역이 있는데 이 중심으로 조선의 중농억상(농업 중시, 상업 억제) 정책이 있다는 것을 알아두면 좋다.
지대 : 지대는 땅이 없는 사람들이 땅을 빌려 농사를 지어내는 풍습이며 지주에게 주는 대가이다. 16세기부터는 지주와 본인의 몫을 1/2씩으로 나눠 타조법과 공작을 받았다. 차후 도조법
공납 : 공납은 집집마다 내는 지역 특산물이다. 16세기부터 공납을 내기 힘들어져 이 공납을 대신하는 방납업자들이 생겼다. 이 방납폐단의 문제는 후에 영향을 미친다.
역 : 역은 노동력으로 초기에는 전쟁이 없어 군역이 곧 요역으로써 굳은 일을 해야했으나 16세기부터는 전쟁이 발생하여 대신 보내는 대집과 방군수포(포를 받고 면제)등의 문제가 생겼다.
이러한 공납과 역의 폐단이 임꺽정의 등장을 초래하였다. (명종)
조선의 사회
조선의 사회는 양반(문, 무신) – 중인(하급관리, 서얼) – 상민(신량역천(봉수군, 수군)) – 천민(노비, 백정)으로 이어지는 단계이다. 초기에는 이 양(민)천제 였으나, 후기에는 (양)반천제로 변하게 된다.
법률은 형법인 대명률과 이후 완성될 민법인 경국대전이 관습법보다 상위에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사법체계가 관찰사 + 수령이 가진 사법+행정+군사의 안에 있었으나, 이후 2차 갑오개혁때는 재판소가 생겨 사법이 분리된다.
구휼은 기존 의창(춘대추납), 상평창, 구황촬요(명종)이 생겨나고 의료로는 동-서 대비전, 혜민군, 재생원, 동-서 할인서등을 설치하여 안정화를 노렸다.
통제는 국가의 통제 형식으로 호패, 오가작통를 활용하며 사족들은 향약을 활용하였다.
+ 관찰사가 수령을 감독하며, 향리는 보조하는 역할로 쓰였다. 이외에 사족들은 유향소(좌수-별감)을 두어 여론을 형성시키고 향약으로 약속을 만들어 농민을 통제, 서원으로 인재양성과 제사를 주관하였다.
이외에도 각 마을의 다섯 집을 묶어 서로 감시하게 하는 오가작통, 향도, 두례가 있었다.
조선의 문화 1
15C와 16C로 나눠서 유학, 불교, 역사를 공부해보자.
15C는 훈구파, 16C는 사림파가 득세한 시점이다. 유학 안에 훈구, 성리학등이 존재하며 이 중 성리학은 특히 철학적 학문으로써 존재한다. 성리학자들의 목표는 “군자”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성리학자들은 보통 정직, 강직, 수양하는 모습을 보인다.
성리학 공부는 중앙과 지방으로 나눠서 진행되는데, 중앙에는 성균관(고등)이 존재한다. 이 성균관의 총장은 대사성이 존재하며 성균관에는 교육을 주관하는 명륜당과 제사를 주관하는 대성전이 있다. 성균관에 오려면 소과(수능)를 통과하고, 후에는 대과(공시)를 통과하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된다. 이때 성균관에 합격한 학생들을 ’생원, 진사‘로 불렀다.
또한 중앙의 중등 교육 기관으로 4부 학당이 존재한다.
지방에는 향교와 서원이 존재한다. 향교가 존재하는 곳을 교촌, 교리라고 부르며 이 교수와 훈도를 하견하여 지방의 중등 교육을 담당케 하였다. 또한 서원이 존재했는데, 이 서원은 사림파가 세운 것으로 교육과 제사를 모두 주관하였다.
16C가 되면 서원이 이어진다. 이때 사림파가 강해져서 그만큼 성리학이 성장한다.
이때 이황과 이이가 등장한다. 이황은 남인으로, 퇴계 이황은 성리학의 큰 나무로써 많은 일을 진행하는데, ’주자세절요_중국에서 온 ’주자‘에 대한 이야기’와 ’성학십도_성인이 되기 위한 10가지 그림과 방법론‘을 작성하여 동방의 ’주자‘라는 명칭까지 가지게 된다.
이러한 이황에게 성리학으로 논쟁을 건 이가 “기대승”이다. 기대승은 사단칠정에 대한 이야기로 사단칠정논쟁을 펼치게 된다. (사단은 리, 곧 보이는 것. 칠정은 가, 곧 보이지 않는 것. 즉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논쟁을 펼쳐 사람이 선해보이는 것과 선한 것중 어느것이 먼저 인지, 분리되는지 등을 이야기한다.) 이때 이황과 기대승의 자신들의 입장과 논리를 펼치며 전국적 토론이 되어지기도 했다.
이후 예안 향약(약조)과 도산 서원(서당)을 짓고, 이런 이황의 성리학은 전쟁이후 일본으로 퍼지기도 한다.
이이는 후의 주류가 되는 서인의 기초로써 동호문답과 성학집요(성인이 되기 위한 글)를 작성하여 리와 기중에 보이는 기도 중요하다는 이론을 펼쳐 이후 현실개혁으로 이어지게 되는 원인이 된다.
또한 이런 현실개혁은 10만 양병설과 이어져 수미법(조세정책_공물을 현물대신 쌀로)등과 연결된다.
15C의 불교과 역사는 불교가 굉장히 탄압을 받기에 큰 것은 없고 오히려 불교를 억제하는 정책이 주로된다.
불교는 숭유억불로써 유학숭배, 불교억제의 길을 걷는다.
도첩제(승려를 제한), 교단 정리(세종)을 통하지만 그래도 서민층에는 불교가 존재하여 수양대군 시절에는 석보상절을 펴냈고 세조는 산경도감도 펴낸다.
역사, 나라가 세워질때는 보통 기존 나라가 정리되어야 한다. 그래야 “앞의 왕조가 무너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라고 말하며 본인들 왕조의 기틀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도전은 ’고려국사‘를 편단체(연도별 정리)로 펴낸다. 또한 문종때는 ’고려사‘를 작성하여 기전체(하나하나 펴냄)로 펴낸다. 이 ’고려사‘의 요약+보강 버전이 ’고려사절요‘ (편단체)이다.
이후 ’실록‘이 편년체로 춘추관 담당하여 작성이 된다. 이는 세계기록유산이다.
이후 성종때 동국통감(서거정)을 작성하여 고조선부터 고려까지 전부 작성하게 한다.
또한 동문선(서거정)을 작성하여 국가시문집을 작성한다.
16C의 불교는 아예 X, 역사와 성리학은 보통 성리학에서 누가 “정통”인지를 서열로 정하여 나눈다. 때문에 중국이 정통이며 우리는 따른다는 논리로 이이에 의해 ’기자실시‘를 쓰여지기도 한다. ’기자_중국이 우리나라 원조인 사람‘. 이렇다보니 청(만주족)나라를 이렇게 인정안하고 그 삼전도항복이 발생한거다..
조선의 문화 2
15C, 지리. 지리는 초에 태조가 아 내가 하늘의 명을 받아서 나라를 세우거니까 땅을 잘 안다는 논리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작성한 것이다. 이를 성종때 정리하고 완성된다. 이것을 바탕으로 동국여지승람을 작성한다.
법과 윤리 면에서 성종의 국조오례의를 참고한다. 경국대전이 세조~성종때 완성된다. 삼강행실도(당시 세종이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일을 겪고 백성들을 가르치고자 작성)를 편찬하여 충신, 효자, 열녀의 개념을 퍼트렸는데, 백성들이 한자를 읽지 못해 한글을 만들고 작성한 것이 바로 훈민정음이다.
16C. 지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중종)에 다시 작성되고, 법윤리는 이륜생실도(중종)으로 정리되어 연장자와 연소자간의 예법과 친구들 사이의 예법까지 알수있게 된다.
또 다시 15C와 16C로 나눠서 정리해보자.
15C의 문자와 인쇄, 태종이 주자소를 설치하여 계미자(계미년에 만들어진 글자)를 제작, 세종이 갑인자(갑인년에 만들어진 글자)를 제작한다. 이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훈민정음이 나온다.
천분과 역법으로는 태조의 천상열차본야지도(별)와 태종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있으며, 세종때는 장영실에 의해 측우기, 자격루, 앙부일구등이 제작되고 설치되었다.
또한 역법서가 기존에는 원의 수시력과 아라비아의 희회력이 기준이었는데, 조선에 맞는 역법서인 칠정산을 이순지가 작성한다.
의학과 농서로는 세종시절 3개, 향약집성방(한자의 중국 약재를 번역), 농사직선(우리 농토 기준 작성), 의방유치(의학 백과사전)등을 작성한다. 성종시절에는 금양잡록이 있었다.
건축과 탑으로는 이제 막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겨온 참이기에 궁궐과 성곽, 경복궁(전기)와 창덕궁(후기)가 건축되었다. 만들 때 항상 좌묘(동묘), 우사(사직단)의 법칙이 있고 중간에 궁궐이 들어가는 양식이었다.
여기에 선농단(풍년 기원)이 추가되기도 하였다.
또한 햇인사 장경판전이 건축되었다. 기존에 팔만대장경이 제작은 되었으나, 이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한 장소가 마땅치 않았고, 이것을 위해 장경판전이 건축되었다.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세워졌는데, 이 양식은 고려시대의 경천사지 10층석탑에서 나왔다. 이 위치가 탑골공원인 것이다.
공예로는 분청사기가 있었다.
15C에 회화로는 고사관수도(강희안), 몽유도원도(안평대군의 꿈 속 광경)
문학으로는 금오신화(김시습_한반도 최초 한문소설)이 있었다.
16C는 아무래도 전체적으로 성리학의 무한한 발달과 불교를 줄이는 등으로 서원 중심 구성이 시작되었다.
그 중 최초 서원은 백운동 서원(주세붕)이며, 이황이 이 서원에 지지를 하여 왕에게 현판을 간청하고 왕이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내려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 서원에서는 성리학의 배급자라고 할 수 있는 한향을 배향한다.
공예는 아무래도 깨끗한 백자가 생산되었다.
회화로는 사군자-매,난,국,죽이 유행하기 시작하고, 초충도(신사임당) 그림들이 유행한다.
문학으로는 관동별곡, 사미인곡을 쓴 정철(이후 기축옥사)가 유명했다.
표 정리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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