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11IDvWVPExs?si=QeQjI0XhY7OTxSEl
https://www.youtube.com/watch?v=MaFDoc-WxQQ
글 정리 공부
조선후기 정치
삼전도의 난 이후 사림파들이 조선 후기까지 권력을 쭉 이어가는데, 이 과정에서 붕당(선조), 예송(현종), 환국(숙종), (경), 탕평(영조, 정조), 세도(순,헌,철) 이며.
여기서 붕당은 따지고 봤을 때 선광인효 현이며, 이 사이에 임진왜란, 중립외교, 삼전도의 굴욕, 북벌론등이 있었던 것을 이해하고 있자.
<선조>
일단 붕당이란, ‘뜻이 맞는 이들끼리 모인 당’ 이라는 의미로 자리가 한정되어있는 이 상황에 인사권을 가진 “이조 전랑”을 누가 먹는냐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붕당 초기, 정여립이 서인에서 동인으로 옮긴 상황에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서인이 신고하여 동인들이 난처해졌었다. 이것을 신고한 것이 정철(서인)인데, 이에 정여립과 관련된 모든 이가 죽어나가고 이것을 ‘기축옥사’라고 부르게 된다.
이 정철이 이후 건저의(세자 책봉 요구)를 하자 선조가 정철과 서인을 날려버린다. 이때 서인이 받을 죄를 놓고 북인(과격파_싹 죽이자)과 남인(온건파_벌만 주자)로 나뉘게 된다. 북인이 광해군과 친했고 이후 북인들은 인조반정 때문에 같이 없어진다.
<광해군>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상당히 잘 마무리하려고 한 왕이다. 선조가 도망갈때에도 분조(조정을 나누다)하여 현장을 지키고, 특히 중국 명나라와 여진 후금 사이에서의 중립 정책을 진행한다. 이 대표적 사건이 ‘강홍립 투항 사건’ 강홍립은 명을 도우러 가지만 중간에 광해군의 요청으로 후금에 투항하였고, 이것이 밝혀져 인조반정의 영향을 준다.
이 외에도 인조반정의 빌미가 된 것으로, 대동법의 시행 / 영창대군(동생) 시해 / 인목대비 폐위등 5가지의 이유로 인조반정이 이루어졌으며, 북인들도 함께 사라지게 된다.
이렇게 동인이 전멸, 북인도 전멸하고 남은 것이 남인과 서인이었다.
<현종>
이때 예송논쟁이 발발하는데, 현종의 아버지인 인조의 비인 자의대비는 효종보다도 어린 나이로 비가 되었다. 때문에 효종(양자 둘째)이 죽었을 때 과연 자의대비는 얼마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에 대한 것이 바로 예송논쟁이다. 일단 남인(허묵, 윤휴)의 주장인 효종이 둘째니 1년만 입는다는 것(장남은 3년), 서인(송시열)은 왕이니까 다르다는 의미로 3년을 입자고 주장했다. 이후 서인이 승리, 실제로 1년만 입게 되었다. 이후 효종의 부인인 인선왕후가 죽고 난 다음에는 맏며느리가 아닌 둘째며느리부터는 9개월(서인)을 상복입느냐, 혹은 그래도 왕후인데, 1년 상복을 입자(남인)으로 나뉜다.
이때 현종은 남인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숙종>
숙종이 오른 뒤, 숙종은 권력을 몰아주고 회수하고, 다시 몰아주고 회수라는 등의 방법으로 왕권을 강화한다. 이것이 “환국”이다. 이 환국 기간동안에는 상생이 아닌, 일당 전제가 배경이다. 사림들간의 권력 투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때 경 기 갑이 발생한다.
이전에 숙종은 남인을 편애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요 핵심 부처는 서인이 잡는 경우도 많았다.
경신환국 : 남인이 피해, 서인이 이득본 환국으로 서인이 남인들의 역모를 밝혀, 이때 남인의 권력을 다시 서인에게 주어 남인이 공격하는 과정 남인의 몰락(윤휴와 허적 사망)이 발생
기사환국 : 숙종은 장희빈을 중전에 앉히기 위해 기사환국을 진행한다. 중전(인현왕후)가 쫒겨나고, 송시열이 사약을 받아 사망한다. 남인이 다시 권력을 잡는다.
갑술환국 : 다시 숙종은 남인들이 반역을 꾀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남인들을 부시고 서인들을 정권에 세운다. 이것이 갑술환국, 인현황후가 다시 돌아오고, 장희빈은 사약을 받고 사망한다. 이제 남은건 서인.
이때 장희빈의 아들이 경종이다. 경종을 지지하는 모임이 소론, 영조를 지지하는게 노론.
<경종>
경종은 병등으로 인해 요절한다.
<영조>
영조는 앞의 사건들을 보고 탕평책을 펼친다. 이 탕평책을 보이기 위해 성균관에 탕평비를 세운다. 단 탕평책에 조금 한계가 있었다. (단순 자리등의 통합과 섞는 결합)
정치 - 산림(산에 사는 사림) 불인정, 서원 수를 줄이고, 이조 전랑의 권한 약화, 속대전_경국대전 속편 작성
경제 - 균역법(군대가는 것을 베필로 대신할 때 1년 1필만 내도록)
사회 - 청계천 준설작업(준천사 기구 창설), 신문고 활용, 사형수 삼심제
문화 - 동국문헌비고
다 좋을지만 그의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죽인 행동이 있었다. 이후 사도세자의 아들은 정조가 왕위.
<정조>
정조는 기존 노론들이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는 것을 신경썼다. 때문에 기존 탕평이 아닌, 논리를 통한 준론 탕평을 시작하였다.
정치 - 규장각에서 초청해 계몽하는 작업(초계문신제)진행, 규장관 검서관에 서얼 등용, 자신의 친위부대 장용영 설치, 대전통편 작성.
경제 - 신해통공을 시행. 본래 이때는 시전 상인들이 금난전권으로 독점권을 사용중이었는데, 이것을 부시고 누구나 장사가 가능하게 신해통공을 시행함.
사회 - 지방의 사림들 약화를 위해 향약을 지방 양반 대신 수령들이 운영하도록 함.
문화 - 동문휘고라는 대외관계 관련 서적 작성, 수원화성(아버지 명예회복)을 통해 노론의 장악에서 벗어난 도시 기획함.
그런데.. 갑자기 정조가 급사한다. 노론들은 정조때 너무 많은 피해를 봤기에 그것을 아예 막고자. 세도정치를 시작한다. 순서대로, 순조, 헌종, 철종. 이때 소수가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19세기가 진행된다.
소수 가문(안동 김씨, 풍양 조씨)들은 비변사와 5군영을 잡고, 매관매직을 진행한다. 이로 인해 백성들을 착취하고 삼정(진정(토지), 군정(역), 환곡(고리대))가 문란해 진다.
이러니 봉기가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이때 중요한 것으로 조선시대 법정 정리하면!
경국대전(성종) - 속대전(영조) - 대전통편(정조) - 대전회통(고종-흥선대원군)
조선 후기 (조직, 외교)
그전에 살짝 복습. 붕당 정치는 선 / 광 / 인 / 효 동안 이뤄졌으며, 현종때는 예송, 숙종때는 환국, 나머지 경 / 영 때는 탕평, 정 / 순 / 헌때는 세도정치이다.
이 중 선조는 이조전랑, 기축옥사(정철), 광해군은 중립외교 및 인조반정 밑판, 인조는 친명배금, 효종은 북벌론, 현종은 예송 등. 숙종때는 세 가지 환국으로 경신환국으로 남인 2명(허적, 윤휴), 기사환국으로 서인(송시열), 갑술환국(장희빈 폐비, 왕후돌아옴).
정조는 속대전, 영조는 신해통공, 초계문신제이다.
다시 외교로 들어가자. 일단 여진/후금/청나라
기존 여진과의 관계로 무역소와 북평관, 사민 정책으로 위쪽에 시민들을 보내놨었다. 이때 이후 임진왜란 이후 후금으로 발전하고 청나라로 발전했는데..
<광>
광해군 시절 명나라는 저물고 후금(이후 청나라)은 떠오르던 시대, 명나라가 도움을 청했지만 중립외교로 강홍립을 투항시켜 이는 인조반정의 빌미가 된다.
<인>
인조는 친명배금이 기본으로 깔고 들어간다.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발생하는 계기가 되는데, 정묘호란때는 강화도로 피신하고 결국 형제의 관계를 맺었으며, 병자호란때는 남한산성으로 피난갔으나 결국 삼전도의 굴욕으로 사대의 관계를 맺었다.
이때 정묘호란때는 정봉수가 용골산성에서, 이립이 어느정도 막아냈으며, 병자호란때는 주화파(항복하자) 최명길과 주전파(항복X) 김상헌이 대립하고, 임경업 장군이 백마산성에서 막아내고, 김준룡(광교산), 김상용(강화도)에서 활약이 있기는 했다. 결국 사대를 맺었지만.
<효>
효종은 북벌론을 들고와 송시열, 윤휴와 함께 북을 치기 위해 군까지 준비했었지만 청이 나-선 정벌(러시아 정벌)을 요구해 오랑캐를 도와 싸우게 된다.
<현>
그저 예송말고는 없는거 같다.
<숙>
환국이자, 청나라와 영토 관련 문제가 발생한 왕,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는데 이 정계비에는 서위압록, 동위포문이 기본으로 전제되어 있었다. 서위압록(서쪽으로 압록강이 경계이며), 동위포문(동쪽으로는 토문강이 경계이다). 하지만 이 동위포문이 문제였으니 토문강이 발음문제로 간도를 포함하냐 포함하지 않느냐를 다투게 된다. 대한제국 때 간도관리사를 파견하기도 했는데 1905년 을사늑약으로 우리의 외교권이 빼앗기고 일본이 간도협약(1905)을 맺어 지들이 우리땅을 중국에 양도한다..
<정>
정조는 청나라에게서 배워오자는 마인드로 박지원, 박제가등의 북학파를 데려와 북학론을 펼친다.
일본과의 관계
일본은 임진왜란을 거치며 영향이 많았다. 동평관, 3포 개항, 쓰시마 정벌등을 이후로 임진왜란이 발생했는데,
비변사 : 이 과정으로 비변사가 임시기구(3포왜란 당시 설치)에서 상설기구(을묘왜변)로 변했으며 권력이 강화된다. 이러니 굳이 의정부 6조를 쓸일이 없어져 얘네의 권력이 약화된다. 이후 비변사는 세도정치때 전성기를 맞는다.
중앙군(5위) : 중앙군은 임진왜란때 뻥뻥 뚫렸다. 이 이유는 포를 내고 군대를 안가는 등의 이유와 예비군적 성격의 군이 거의 전부인 것이라 판단하고 직업군인을 정하기 시작했다. 모병제.
이때 5군영의 틀이 잡힌다. 특히 정유재란 이전 잠깐 휴전기간일 때 훈련도감(포수+사수+살수=3수병의 직업군인 체계)을 설치하고 인조때는 수어청, 총융청, 어영청, 숙종때 금위병까지 합쳐 5군영을 완성시켰다.
지방군 : 기존 영진군체제(지역민 예비군 시스템)은 너무 사람이 적어서 속오군(양반부터 노비까지) 더 좋은 예비군을 구성시켰다.
수비체제 : 진관(지역방어체제)에서 제승방략(각 지역으로 장군이 내려와 군인들을 모아 싸우러 감)으로 바꿨으나, 이 제승방략은 시간도 오래걸리고 후방이 너무 약해져서 다시 진관체제로 바꿨다.
임진왜란이 지나고 광해군, 이때 도쿠가와 이예야쓰가 조선과 약조를 맺고자 했다. 하지만 일단 포로들은 받아와야 약조가 진행되기에 유정(사명)을 회답 겸 포로 관련으로 보내 3000명 가량을 받아왔다.
이후 1609년 기유약조가 맺어졌다.
나중에는 통신사를 보냈는데, 이 통신사는 중국-조선-일본으로 문화와 기술을 전달했다.
이후 수신사시기(개항 이후)에는 서양-일본-조선으로 문화와 기술을 받아오는 역할을 하였다.
숙종때는 을릉도와 독도 문제가 생긴다. 왜구들이 너무 오니까 섬을 비워뒀었는데(공도정책), 그래도 왜구 어부들이 자꾸 넘어왔다. 그래서 빡친 어부 중 1명은 안용복이 일본에 직접가서 을릉도와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확인을 받고 왔다. 이는 대한제국 칙령 제 141호에 적혀있다. 이후 일본의 러-일 전쟁때 일본 시네마현으로 강제편입되었다.
표 정리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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