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2znkdl6z8e8?si=L1TWwxkls663qSb1
https://youtu.be/VxvokDpUY5Y?si=O5Da3Wwj7h0Grm9q
https://youtu.be/ZS7kO4cC7YI?si=6pRdXbUZZhvym3LF
글 정리 공부
조선의 시작은 공민왕의 아들인 모니노, 우왕에서 시작하여 이성계와 정도전, 정몽주가 핵심이다.
조선 전기 – 정치
이성계가 조선을 세웠지만 대다수의 문신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먹은 조선을 거부한다.
공민왕이 부린 개혁의 씨앗이 당장은 실패했다지만 신진사대부를 키워서 조선을 건국한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부류로 갈린다. 정도전 부류의 새로운 나라를 키우자는 정도전파, 정몽주 부류의 말이 안된다는 온건, 정몽주파. 차후 이방원이 선죽교에서 척살하지만 아무튼.
이 신흥 무인 세력은 위화도에서 회군 후 반대하는 온건파를 과전법을 통과시켜 권문세족의 땅문서를 빼앗아 권력을 죽인 다음, 이후 조선을 건국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온건파, 유학파들이 거부하고 낙향하여 두문불출(두문동에서 나오지 않다)하게 된다.
중앙집권의 시작
태조는 상봉 정도전이 설계한 판을 그대로 걷게 된다. 정도전은 왕이 바뀔 수 없는 옛 논리에 대응하기 위해 재상(본인)을 중심으로 한 나라를 설계하고 펼친다. 그래서 정도전은 한양 도성을 설계하고 과전법까지 시행할 수 있었으며, 불교 쪽 힘을 줄이기 위해 ‘불씨잡변’을 작성,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조선경국전_경제문감’또한 작성했다.
그런데,, 태종 이방원은 재상중심나라를 원한게 아니라 왕권강화를 원했기에 왕자의 난이 발생했다. 이후 태종은 6조 직계제를 개편(국왕-의정부-6조 순이 아니라 직접 명령)하고 사병 혁파(지는 사병으로 왕이 됨), 양전(땅을 조사)사업, 호패법(신분장악), 신문고, 사간원 독립(본래 왕권 견제 기구이나 이때는 신하들을 때려잡음)을 시행했다.
이후 세종이 등장, 세종은 의정부 서사제를 통해 다시 의정부를 중간에 끼워 신하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했고, 집현전과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또한 4군(최윤덕) 6진(김종수)를 개척하고 쓰시마(이종무)를 정벌하였다.문종은 몸이 약하여, 단종은 수양대군(세조) 때문에 2년도 채 안되어 실권을 빼앗겼다.
세조는 단종을 끌어내리며 계유정난(한명회)를 통해 권력을 잡았고, 이후 신숙주(수양대군파)vs성삼문(그래도 단종 복위를 노린 매축헌) 대결구도도 이때 떠올랐었다.
이시애의 난(중앙집권불만)이 이때 함경도에서 발생하여 남이과 구성군 장군이 이를 제압한다. 이후 다시 6조직 체계로 돌려내고 집현전을 폐쇄, 왕권을 광화하고 경국대전을 작성 시작한다. 이때 과전법을 대체하고 직전법을 시작한다. (전현직 관료 – 현직 관료만)
예종은 단명하고
성종은 다시 경연을 진행한다. 이는 신화들과 홍문관에서 토론을 진행하여 다시끔 왕권을 살작 내려놨으며 이 시절 경국대전이 완성된다. 또한 ‘국조오례의(제사이론서)’‘악학궤범(국악이론서)’ 이렇게 성종 때 다양한 조선의 시스템이 정착된다.
이 즈음 낙향했던 선비들이 나름 공부를 하고 있었고, 그들이 즉 사림파로써 한영회가 주축이던 권력을 잡은 훈구파와는 달랐다. 이 훈구세력들은 사림파를 지속적으로 갈궜으며 그것이 ‘사화’로 진행이 되어졌다.
사화는 무, 갑, 기, 을 사화로,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로 네 가지이다.
일단 무오사화는 연산군 시절, 유자광이라는 훈구세력이 사림파를 일러서 (김일손의 ‘사초’에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심었다고_이는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이른 케이스를 말하며 세조를 능멸하는 것이라는 의미라고) 이 김일손 사림파 측이 날라갔다.
일후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우리엄마 죽인사람들 다 나와_하여 김굉필은 연루되어 사약을 받게 되었다. 결국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쫒겨난다.
기묘사화는 중종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중종과 조광조가 많은 일들을 한다. 일단 중종반정에서 뜸들인 사람들도 훈장 리스트에 있는 것을 본 위훈을 없애버리고, 이 훈구세력과 본격적으로 대립한다.
또한 소격서(유학파라서 하늘에 제사드리는 것등을 꺼림)를 폐지하고 소학을 보급한다. 현량과(인재 사림 등용)을 제안하였다. 이때 이후 사림파가 너무 커지자 중종은 기묘사화(주초위왕)을 꾸며 조광조를 죽인다. 임종은 병으로 너무 빨리 죽는다..
을사사화는 명종시절 윤씨가문, 외철 대윤(윤임), 소윤(윤원형)대립 끝에 소윤이 이긴 사건이다.
이후 다양한 사림측 세력이 있으나 이번에는 이이-서인-노론으로 정권이 이어졌다는 것까지 알아두자.
조선의 정치 조직
저번 중앙조직은 의정부(영의정, 우의정, 좌의정)과 6조로 운영된다. 이 의정부와 6조, 왕과의 관계에 따라 정치 조직을 나눌 수 있다.
왕권을 강화할 시즌은 태종과 세조는 6조 직계제를 활용하여 승정원(다른말로 옥당, 비서기관_비서기관장 도승지)를 강화시키고 의금부(반역/역모 담당, 의금부장_금부도사)를 강화하였다.
또한 왕권을 잠시 내려놓는 세종시즌에는 의정부 서사제를 진행하여 언론기능의 3사
(1. 사간원, 간쟁 담당, 사관원장_대사간, 2. 사헌부, 감찰 담당, 사헌부장_대사헌, 3. 홍문관(옥당), 경연(토론)담당, 홍문관장_대제학)를 진행시켰다. 이때 3사를 전부 장악하고 올라온게 사림파이다.
이 3사와 한성부, 춘추관(역사-실록), 장례원(노비), 성균관(교육)들이 있었다.
정리하면 중앙에서 이 의정부 6조 체제 속에서 3사, 의정부와 승정원이 서포트한다고 생각하자.
조선의 지방 행정 조직은 8도 체제로 일원화되었다. 기존에는 5도 양계로 이원화되어있었는데, 이번에 아예 통일시킨 것이다. 이때 8도에는 관찰사를 파견한다. 이때 관찰사는 매우 힘이 강한데, 이 관찰사가 있는 곳이 감영이며 감영에서 각 수령(사또)들을 관리했다. 이 수령들은 8도 밑의 부, 목, 군현을 관리한다.
이 수령들은 7사(일곱까지 덕목과 일)를 진행하며 행정, 사법, 군사를 모두 관리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8도 부,목,군현에 수령과 관찰사가 파견되었다는 것이다. 이 지방관들은 부패를 막기 위해 임기제와 상피제(고향에 파견X)을 실시하였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렇다보니 그 지역의 향리들은 권력이 약해질 수 밖에 없다. 이 향리를 걷어내어도 그 지역의 양반(사족_사림)이 있기에 어느정도 지방관과 양반의 대립이 있었을 것이라 파악한다. 기존 사림파는 왕권을 대표하는 지방관과 정확히 반대되는 입장이기에 그러하다. 이 사족들은 다양한 권력 요소들을 가지는데, 첫 번째로 유향소 (향회주관 및 향안에 오른 이들이 지역을 담당하는 양반)로 여론을 담당하고, 두 번째로는 서원을 지어 교육과 제사를 지내는 역할을 하며(지방 중,고 역할), 세 번째로는 향약으로 농민들을 통제했다.
이렇게 중앙과 지방에서 일할 관리를 선발해야 했는데 양식이 존재했고 그것이 바로 과거이다.
이 과거는 6조 중 예조에서 담당하여 문과(양인 이상이면 참가가 가능하며 서얼(첩의 자식)과 재가녀(재혼녀의 아들은 불가)가 참여가능했으며 무과와 잡과 과거제를 실시, 승과 과거제를 폐지하였다.
또한 천거(추천제)가 존재하여 이는 헌량과를 주장한 조광조가 대표적이며, 문음제도(음서)는 가능했지만 고위관료까지는 막혀있었다. 또한 하급 기술직에 한해 취재(기술시험)이 존재했다.
군사조직으로는 양인개병(양인은 모두 군대를 간다)+농병일치(군역을 농사와 함께)로 의무를 다하게 했다.
또한 5위(동서남북+가운데)+영진군(지방군)으로 편성했다. 이는 후기 임진왜란 휴전시절 5군영 속오군
으로 바뀐다. 아무튼 외에도 잡색군(예비군, 향리+노비)와 5위, 진관체제(지역방어체제)로 구성했다.
조선의 외교정책
조선의 외교정책은 기본적으로 사대 교린이다. 사대(명을 사대하며) 교린(여진, 일본, 규수와 교류한다)
이때 사대는 정말 사대한다기 보다, 경제적 이익관계라고 보면 편하다.
명과의 관계
명과의 관계에서 초기에는 삐딱선을 탔다. 특히 최영은 초기에 요동 정벌을 위해 이성계를 보내기도 했었고 정도전도 정신못차리고 요동정벌을 명령했다가 죽었다. 하지만 태종이 사대외교(공무역)의 틀을 짜내고 이후까지 이어졌다.
여진과의 관계 (세종)
여진과의 관계는 강경책, 온건책이 있다. 강경책으로는 4군(최윤덕), 6진(김종서)로 우리 영토를 확장시켰고 이 땅을 우리의 땅으로 확실히 소화하기 위해 사민(백성을 이사시킴) 정책을 펄쳤다. 이때 토관제(토속 주민을 관리로 두다)를 시행하여 상피제에서 예외를 두기도 했다.
온건책으로는 한양에 북평관과 태종시절에는 무역소까지 두어 식량을 이용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했다.
일본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데, (세종)
일본과의 초기 관계는 여진처럼 강경책과 온건책이 있었다. 강경책으로 쓰시마섬을 정벌(이종무)한 것이 있고, 온건책으로는 3포 개항(부산포, 제포, 염포)를 통해_계해 약조 온전책을 펼쳤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인들이 계해 약조를 어기고 더 가져가려고 한다.
이때 시작으로 3포 왜란(중종_주초위왕)이 발생하여 임시로 비변사(변방의 문제를 준비)를 설치하여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후 을묘왜란(명종_을사사화)이 발생하여 비변사가 상설화되었고, 결국 임진왜란이 발생한다.
임진왜란_1592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을 치기위해 땅을 열라는 명분(정명가도)으로 발생하였다.
1. 부산진 도착 2. 동래성 전투(송상헌_순절하심(끝까지 싸움)) 3. 탄금대 전투(신립_충주)하였지만 탄금대가 무너지자 선조는 피난을 결정하였고, 4. 이순신의 한산도대첩(학익진) 5. 김시민장군의 진주대첩으로 막을 수 있었음. 6. 이때 중국이 참전하고 조-명 연합이 결성되었고 이후 평양성을 탈환함. 7. 정문부 중심 의병(곽재우, 고경명, 조헌)이 일어나 북관대첩을 8. 이후 행주대첩(권율)으로 서울을 탈환할 수 있었다. (3대 대첩은 한산대첩, 진주대첩, 행주대첩을 말한다)
이때 일본이 잠시 휴전을 선언하고 조선은 빠르게 재정비에 돌입한다.
일단 5위 영진군을 개편하여 5군영 속오군으로 개편한다. 특히 5군영은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직업군인으로써 포수, 사수, 살수로 나눠 정비했다. 또한 이때 비변사가 커지며 의정부와 6조가 약해지게 된다.
다시 정유재란으로 휴전이 풀리고 이순신이 명량대첩(울돌목)과 노량해전으로 이를 막아냈다.
이 상황에서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전란을 잘 막아내었다. 이때쯤부터 명이 약해지고 후금(여진을 이음)이 성장하고 에도 막부(도쿠가와)가 세워져 다시 광해군은 일본과 수교를 맺었다. 이때 일본은 한국에서 도자기공와 성리학도를 납치해가서 이런 쪽이 발달한다. 일본과 기유약조로 유정을 파견하고 쇄환(포로를 돌려받음)을 거쳐 실질적 수교에서 복귀했다.
여기에 광해군은 이때 명나라에게서 후금을 공격해달라는 요청을 받지만 중립외교를 선택한다. 또한 이때 대동법을 시행하고 동의보감(허준)이 쓰여진다. 이전의 영창대군을 죽이고 안목대비를 폐위시켰다는 것까지 합쳐진 결과 인조반정이 일어난다.
인조반정으로 인조와 함께 서인이 들어온다. 이때 서인은 친명배금정책을 펼치고 이괄의난(나도 인조반정했는데 너무 받은게 없다)를 제압한다.
이후 정묘호란, 후금이 처들어와 강화도 피난으로 형제관계
병자호란, 청나라가 쳐들어와 남한산성 피난으로 삼전도항복을 거쳐 군신관계로 변한다.
(최명필_절대 항복X, 김상헌_동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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