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2G3POgHNlBg?si=5h-Z8CCXB9EG_9uv
글 정리 공부
광복
1945년 8월 15일 광복한다.
카얄포(포츠담) 기억하자.
일단 광복전 카이로 회담(43년_영미중참가)에서는 한국의 독립문제가 이야기된다.
얄타회담에서는 중국대신 소련이 참가하며 일본이 항복하면 38선 기준으로 나눠먹자는 내용이 중심이다.
이때 안에서는 일본이 망해가는 것이 보이니 준비하자는 것이 이론이었고, 조선 건국 동맹 (여운형)을 준비하게 된다. 중국 충칭의 임시정부도 준비중.
포츠담회담 이후, 일본이 갑작스레 항복을 선언하며 광복은 분단과 함께 다가온다.
얄타회담에 의해 소련이 한반도를 빠르게 넘어오고 있던 상황으로 광복 이전 38도 기준으로 위에 있게 된다.
광복 당시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점령군 형태로 들어온다.
이에 조선건국동맹이 건국준비위원회(건준위)로 이름을 바꾸고 일본이 빠지며 생긴 치안 공백을 메운다.
건준위(여운형 주도)가 이때 나라를 선포한다. 바로 조선인민공화국. 하지만 남측의 미국이 어떠한 행정조직도 인정하지 않는다. 조선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모두 부정한다.
그래서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이 충칭에서 한국으로 주석 자격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이후 일반 개인 자격으로서 국내에 들어올 수 있게 된다.
전적으로 미국과 소련의 의견으로 한반도가 좌지우지되는 모습이다.
이후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가 열린다. 이때 한국의 문제도 이야기된다.
1. 한반도에 임시정부 수립.
2. 일정시간 신탁통치
3. 미·소 공위(공동위원회)
그런데 이러한 정보가 오보가 나며 이념갈등에 불이 붙게 된다. 바로 임시정부 수립이 빠져버린 것.
이 결과 신탁통치만 있던 당시에는 좌우 가리지 않고 반대하였으나, 임시정부 수립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좌익진영(박헌영)은 이를 지지하기 시작한 반면, 우익(김구, 이승만)은 임시정부 수립에 관계없이 신탁통치를 반대한다. 좌·우간 엄청난 대립이 일어남. 이 틈에 친일파들이 우익으로 스며들며 반공체계로 갈아타기까지 한다.
사실 이러든 말든 소련-미국은 신경안쓰고 자기들이 결정하면 끝나는 사안이라 '1차 미·소 공동위원회'를 덕수궁 석조전에서 연다. 여기서 첨예하게 대립하는 주제가 바로 “회의 참가 자격”이었다.
회의에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찬성자만 참가시키면 소련쪽에 유리해지고, 모두 참가시키면 물량으로 미국이 유리해지는 상황속에 합의점을 못참고 휴회한다. 이승만을 이걸보고 감을 잡는데, 미·소가 있으면 한반도는 어떻게든 빠르게 정부수립이 힘들것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머리가 돌아간 이승만은 ’남한만이라도 독립시켜달라‘는 정읍발언으로 분단위기를 초래하고 만다.
이렇게 분단위기를 느낀 좌·우(중우파, 중좌파_여운형, 김규식)가 합작하여 7원칙들을 내세워 막아보지만 미국이 결국 지지해주지 않고 주핵심인 좌(박헌영), 우(김구, 이승만)이 참가하지않가 무산된다. 이 과정에서 여운형이 암살당한다..
47년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며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시작된다. 결국. 같은 이유로 2차 미·소 공위도 결렬된다.
이런 과정에서 미국이 이 문제를 UN에 넘긴다. UN은 인구비례 총선거를 제안한다. 하지만 소련이 거부하고 UN 소총회로 다시 넘어가. “가능한 지역만이라도 총선거하라”는 의견이 나온다. 이는 이승만의 정읍발언과 비슷하지 않은가
이렇게 5·10 총선거가 예정되고 이 당시 분단을 못 받아들이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거부하는데
1. 가장 대표적으로 김구가 ’읍고‘한다. 절대 남한단독정부는 안된다고.
2. 좌익측의 반대로 (제주 4·3 사건) 좌익진영 (노동당 중심)이 제주에서 폭동을 일으킨다. 진압이 들어오고 이 과정에서 남로당 당원만 제거해야했다. 그런데 제주도 전체를 ’빨갱이 섬‘으로 낙인찍는다.
이러한 영향으로 5·10 선거도 제주도에서만 안열린다.
3. 남북협상이 진행된다. 김구와 김규식이 김일성을 만나러가 ‘남북 제정당 사회 단체 대표 연석회의’를 거쳐 남한이 정부를 세우기 전 북한도 정부를 출범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4. 여수·순천 10.19 사건
제주 4·3사건이 매우 길게 진행되며 이승만 정부에 들어온다. 이때 들어오기 전 제주와 연고가 있던 여수, 순천의 군인들을 데려다가 제주에 보냈는데, 결국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또한 이때 반란을 잠재우며 주변 민간인들이 학살되는 비극이 벌어진다.
이러한 과정에서 5·10 선거가 결국 치러진다. 최초의 보통선거, 직접선거, 평등선거로서의 의미가 있다. 또한 이는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로 이렇게 뽑힌 국회의원이 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였다. 또한 국회의원을 먼저 뽑아야 헌법이 제정되어 제헌 헌법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결국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다. 북한에서도 뒤이어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을 설립한다.
현재 가장 큰 숙제는 친일파 숙청이었다.
때문에 반민특위 (반민족 행위자 처벌 특별위원회)가 열린다. 그런데 당시 자신의 세력이 줄지 않길 원한 이승만이나 거대세력들이 국회프락치 사건과 경찰들이 반민특위를 습격하는등의 행위로
공소시효를 줄여 친일파차단이 진행되지 못한다.
농지개혁도 했다...... 그러던 중..
1950년 6월 25일 전쟁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진다.
김일성이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이끌어내고 애치슨선언(극동방위선라인에 포함이 안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6.25가 본격적으로 발발한다.
낙동강 방어선 (수도를 부산으로 옮김) - 다부동전투
인천상륙작전(장사리에서 학도병들이 중심되어 시선을 동해안으로 묶기도 함)
쭉 압록강까지 올라갔지만 중공군의 개입
철수하기는 시간이 부족하여 흥남 철수(메러디스 빅토리호)+서울을 빼앗긴 1.4 후퇴
이걸 막아내기 위해 국민방위군을 모았지만 물자가 보급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38선 위주로 왔다갔다하다가 소련이 휴전을 제의한다.
51년 개성에서 휴전회담을 한다.
이에 휴전되는 것을 두려워한 이승민 정부는 이에 반항하여 포로교환도 하지 않고 포로를 풀어줘버린다.
이는 심각한 문제였고, 미국에게 미군이 남아있으라는 조건, 미군이 전쟁이후로도 원조를 달라는 조건으로 정전협정이 체결된다. (53년 DMZ)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이 체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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