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와 역을 합친 것을 녹읍이라고 하여 하나의 권력, 군사력과도 이어지는데 이것을 막기 위해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으로 지급했던 것이 신라의 신문왕. 정확히는 수조권만을 지급한 것이다.
이러한 조세, 역, 공납에 대한 기록을 작성해놨던 것이 민정문서이며, 이것이 일본에서 발견되었다. 작성지는 청주(서원경)에서 작성되어졌다고 한다. 민정문서는 촌주가 3년에 한번씩 작성하여 제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토지
그렇다면 다음은 토지이다. 토지는 모두 개인 소유의 땅(정전)이지만 땅은 나라에 의해 보호를 받기 때문에 정전의 소유권과 수조권은 다르다. 이때 수조권이 나라에 있을때는 백성이 땅에서 나온 조세를 나라에 내지만, 공무원에게 수조권이 주어지면 조세를 공무원에게 제출하는 식으로 바뀌게 된다. 이 내용은 근본적으로 어느 시대나 같기에 고대에는 ‘관료전, 녹읍’, 중세에는 ‘전시과’, 근세에는 ‘과전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본래 이 ‘정전’도 국민의 것으로 인정해주지 않았지만 성덕왕 시절, 이것을 인정해주었다.
이후 신라 후기 왕권이 약해지며 경덕왕 시절 녹읍이 부활한다.
시장으로는 지증왕시절(맨 처음)에 동시가 나왔었고, 이후 인구 증가를 통해 추가적인 서시, 남시가 발달되었다. 창고는 고구려의 부경이 있다.
무역
무역으로는 발해와 신라를 중심적으로 보자.
일단 발해는 말이 매우 유명하여 신라도, 백제도, 당으로 가는 길, 일본도등 다양한 길을 활용하였다. 또한 신라는 진흥왕 시절 먹은 한강 유역 당항성에서 당나라와 무역을 하였으며, 이후 통일 신라 시절은 울산항이 떠오른다. 경주와 가까워야 무역이 활성화되기에 특히 그랬으며, 주로 판매되어지는 것은중동의 유리제품과 원성왕릉의 무인상이 대표적인 흔적이다.
또한 이때 신라방, 신라소, 신라원등이 중국 본토에 세워져서 신라인들이 왕복하였다.
이후 후기에는 장보고가 등장해서 산둥반도에 법화원을 세우고, 청해진을 설치해서 무역과 치안을 담당하였다.
사회
사회는 아직 씨족 사회 기반이라는 점을 벗어나지 못한다.
특히 신라의 화백회의, 고구려의 제가회의(고구려 고씨), 백제의 정사암(부여씨와 8성), 발해는 정당성(3성 6부 중 1)으로 회의를 거치고 중대사를 결정했다.
신라는 특히 화랑도, 화랑과 낭도(화랑을 따르는 사람들과 화랑)들이 중심이 되어 계급갈등을 없애고 화합을 주도하였다.
추가 골품제는 신라에 여전히 남아, 성골은 진덕여왕대에 끊기게 되었다. 진골인 김춘추(무열왕)가 즉위하였다. 이러한 반면, 6두품은 아찬이라는 등급까지밖에 못올라간다.
이러한 현실에 반감을 든 “설계루”, 원효대사의 아들인 “설총” 그리고 가장 중요한
최치원이 있었다. 이 최치원은 당나라의 어려운 시험은 빈공과에 합격하고 항소군을 격퇴하기 위한 “토항소격문”을 작성해서 뛰어난 뜻을 펼쳤다. 이후 시무 10여조, 계원 필경등 뛰어난 글들을 보여주었다.
유교
고구려의 유교는 소수림왕시절이다. 전성기 시절, 태학이 설치되고 지방에는 장수왕시절 경당이 설치된다. 이 경당은 문, 무를 모두 가르쳐 이후 원산학사에서도 이렇게 가르치게 된다.
백제의 유교는 오경, 의학, 역박사등의 3명등이 유명하고 위처럼 발달했기에 논어와 천자문등을 일본에 전달하고는 했다. 또한 유학이 발달하여 사택지적비가 부여(사비)에 세워졌다. 부여는 정림사지 5층석탑, 부소산성, 낙화암등을 볼 수 있다.
신라의 유교는 임신년에 서기한 임신서기석이 발견된 적이 있다. 또한 화랑도의 세속오계(원광대사의)가 유명하다.
통일신라의 유교는 신문왕이 국학을 설치한다. 이때 ‘설총’이라는 6두품이 화왕계를 작성했다.
‘강수’는 외교문서를 잘 썼는데, 특히 천방인문서라는 글(김춘추의 둘째 아들 김인문을 풀어달라)이 당나라 황제에게 전해지기도 했다.
‘김대문’이라는 사람은 ‘화랑세기’ ‘고승전’ ‘한산기’등을 작성화여 자신들의 자주적, 주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통일신라 말 경의 유교는 원성왕의 독서삼품과가 핵심인데, 이때 왕권이 약하여 취소되었지만 과거제의 전신으로써 의미가 크다. 이 통일신라 말에 최치원이 등장했다.
최치원은 빈공과, 토황소격문, 계원필경등을 작성했다.
발해의 유교는 주자감이라는 교육기관에 의미가 컸다.
역사서
역사서는 주로 확실히 본인들이 전성기일때가 대부분이다.
고구려의 경우는 살짝 다른게 수나라에게 공격을 많이 받던 영양왕시절 ‘유기’를 바탕으로 한 ‘신기’를 5권 작성하였다. 백제는 고흥 박사의 ‘서기’가 근초고왕 시절, 신라는 거칠부의 ‘국사’가 진흥왕 시절작성되었다.
도교
도교는 신선사상과 관련되어 죽지않는다는 느낌의 도를 믿는 교이다.
고구려는 무위자연과 사신도, 백제는 산수무늬벽돌과, 금동대향로(외국과의 교류 확인 가능)등. 신라는 화랑도에서 신채호의 남가사상등을 엿볼 수 있다.
불교
불교는 나라를 지키는 것이 불교라고 하여 호국불교라고도 하지만 아직까지의 불교는 글자를 읽어야 그 뜻을 이해할 수 있기에 이해가 가능한 왕족, 귀족들이 중심이었다.
고구려는 소수림왕시절, 중국 전진으로부터. 백제는 침류왕시절 중국 동진으로부터. 신라는 법흥왕시절 이차돈덕분에 불교식 이름으로 짓기 시작하였다.
통일신라 시절 불교의 대중화로 원효대사의 해골물로 “모든 것은 내 마음에 담겼구나”라는 일심사상과 누구든 아미타를 외치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등 노래를 부르는 무애가, 아미타신앙등을, 뿐만 아니라 갈등을 풀어낼 수 있는 “화쟁사상”화쟁사살의 중심에 있는 ‘원융회통’ 십문화쟁혼, 대승기신론소, 금강심매경론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