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는 이제 위에 적은 김춘추, 무열왕이 최초로 진골 출신 왕으로 나-당 연합을 이끌고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후 무열왕의 아들은 문무왕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매소성, 기벌포 전투) 함락하여 통일을 이룬다. 정복을 하여 왕권이 강하였으나 더욱 강화하기 위해 지방복속을 목표로 이때 상수리제도(인질 제도)와 외사정을 파견하여 지방을 견제했다.
이만큼 애국자라서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문무왕릉에 잠들게 되었다.
이후, 신문왕이 정말 많은 일을 한다.
정치, 장인인김흠돌의 난을 제압하고 귀족들의 장인 상대등의 권력을 견제, 집사부의 장인 시중(중시)의 권력을 높여주어본인의 왕권을 강화시켰다. 또한 상대등의 빈자리를 6두품이 채울 수 있게 도왔다.
사회, 사회는 땅이 커져서 여러 땅을 관리하게 되었다. 9주 5소경으로 9주로 나눴고, 5개의 작은 경주를 만들어 관리하였다. 이중 중원경은 충주로 고구려비가 있는 위치, 서원경은 청주로 민정문서와 직지심체요절이 있는 청주 흥덕사가 위치하여 중요하다. 군대 편제가 주당 1서당으로 9서당 10조를 통해 교육과 군사 또한 관리하였다. 10정은 1개의 주가 너무 커서 2개를 넣은 것.
경제, 경제는 녹읍을 금지하고, 관료전만을 허가하였다. 녹이란 본래, 그 땅에서 나오는 노동(역)과 세금(조세)을 합친 것이라 이는 곧 군사력이 될 수 있기에 금지하고. 이때 세금만 걷으라고 한 것이 관료전이다.
문화, 문화는 태학을 이은 국학을 설립하고(마찬가지로 충을 공부해 왕권을 강화 목적), 아버지의 집(문무왕)을 새로 지어 감은사를 지었다. 이때 만파식적도 같이..
이 전기의 강한 권력은 혜공왕이 암살당하기 전까지 간다.
통일신라 후기
후기부터는 급격히 귀족들의 권력이 강해지며 녹읍이 부활, 상대등의 권력도 부활, 왕위 다툼 증가등. 농민들이 힘들어하고, 이때 김헌창의 난이 발생한다.
이제 이러한 바탕으로 호족들이 날뛰기 시작한다. 호족들은 1세대 호족과 2세대 호족으로 나뉘는데, 1세대 호족으로 장보고가 있음.
장보고는 중국과의 네트워크 기관 법화원과 바다의 무력 도구인 청해진을 설치했다.
이후 견훤, 궁예, 왕건이 2세대 호족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먼저 견훤, 완산주(전주)에서 후백제를 시작하였다. 특히 후당, 오월에 사신을 파견하여 사이를 좋게 하는 것이 크다. 궁예, 궁예는 송악에서 후고구려를 시작하여 특히 아건, 태봉으로 이름을 자주 바꿨다. 이후 아래에 광평성을 두었다.
왕건은 고려(송악)에서 시작했다. 초기에는 견훤이 워낙에 강했으나 차후에는 달라졌다.
일단 왕건은 공산 전투에서 거의 졌으나, 신숭겸이 왕건의 대피를 도와 살아나갔다.
이후 견훤이 신라의 경애왕을 죽였으며, 이후 고창 전투는 왕건이 이긴다. 고창에서 이겼으나 그 고창이 아니라, 우리가 여기서 이겨서 동쪽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하여 안동에서 싸워 이긴 것이다. 아무튼 고창전투가 끝난뒤 신라(경순왕)는 항복하여 완전히 복속된다. 이후 견훤이 아들인 신검에서 투옥당하고 탈출하여 왕건 아래로 들어오게 되고 이제 왕건과 견훤은 한편이 되어 신검을 조진다. 이것이 일리천 전투이다.
이후 원종과 애노의 봉기는 889년 일어났었다. 이는 최초의 농민 봉기이다.
문화, 통일신라 후기의 문화는 호족에게 유리한 면이 많았다. 특히 이산, 선문으로 선문은 글을 배워야 알 수 있는 교종과 다르게 누구든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종을 중심으로 나아가 왕권이 약해졌다. 이렇게 9개의 산에 선종 사찰들이 등장하였다. 또한 풍수지리설등 “경주의 기는 끝났다” “내가 있는 곳이 짱이다” 등이 발생하였다.
발해
발해는 3명의 왕이 끝이다. 하지만 역사상 가장 큰 땅을 가졌던 나라이다. 또한 각 왕마다 연호가 존재한다.
일단 무왕, 인안은 고구려를 계승하였기에 나, 당을 좋아하지 않는다. 때문에 장군 “대문예”와 흑수 말갈을 공격하고, 장군 “장문휴”를 보내어 산둥 반도를 공격하는 등 공격적인 성향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