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어떤 종류의 글을 쓰든 진실되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잘 쓸 수 있었을 텐데’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던 와중 이 책을 빌리게 된 것이다.
처음엔 어딘가 기묘한 이물감이 들어서 내용이 바로 와닿지는 않았다. 누구나 좋아하며 전개와 표현이 일차원적이고 빠른 판타지 소설을 많이 읽은 본인이기에 그런 것으로 생각하지만 조금은 어린애가, 그것도 입양이 되어 갔다가 실패해서 소아청소년과 병원으로 간 주인공이 하는 생각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어휘들과 문장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천재라는 것을 아는 두 번째 독서 때도 이 느낌을 조금 받을 정도로 불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불편하게 느낀 이유가 너무 어린아이답지 않은 문장이기 때문에 감탄을 계속하게 된다. “나에게는 아무도 의견을 묻지 않았다. 나는 부모도 없고, 세상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게다가 진통제를 잔뜩 맞아서 정신조차 혼미한 어린애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이 문장은 상황뿐 아니라 글 전반에서 쓰이는 문체 또한 대표한다. 간결하면서도 자조적인, 모든 것이 자기 마음대로 안 됨을 아는 설이의 마음을 잘 대변하는 어른의 문장이다.
3번의 입양으로 설이는 믿을 수 있는 누군가를 찾아가고 싶어 했고, 함묵증을 고치기 위해 의사 선생님을 찾아간다. 진료를 받으며 소설의 전개는 글쓴이만 알듯이 나 또한 주인공 ‘설이’처럼 곽은태 선생님을 의지하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초등학교에 가서 얻은 어려움 들에도 설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지만, 어린아이가 버틸 수 있는 시련은 진작에 넘치어버려서 조금씩 안 좋은 결과를 낳기도 한다. 새로운 장소에 익숙해지고, 과거를 넘고 나아가면서 설이는 어린아이 특유의 두려움 없는 대화로 할 말과 궁금한 것을 논리적으로 끊임없이 자기 생각을 뱉어낸다.
그 모습은 TV 프로그램의 거짓말로 자신의 삶이 뒤틀려졌다는 분노, 원장선생님과 이모에 대한 배신감들이 한데 뭉쳐 내 목을 막히게 했었기에 통쾌함도 있었다.
그래도 설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응석을 받아주는 이모 앞에서는 아이로 돌아오는 설이에게 조금 현실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까지 전쟁 같은 전개에서 벗어나 진짜 설이네 집으로 돌아온 것 같은 안도 또한 느꼈다. 그렇게 안도감이 잔잔한 여운을 남겼을 때, 책은 어느새 넘길 페이지가 없는 상태였다.
곧바로 이어진 것은 “나도 설이처럼 열심히 살며, 할 말을 다 하고 살아야지!” 따위의 생각이 아닌 “나는 어떠했는가?” 라는 새로운 페이지를 탐구하는 것이었다. ‘설이’는 나보다 따돌림의 시련에서 강력히 대응할 수 있었고, 답답해하는 면을 곧바로 찾아내어 표현할 수 있었다. “나는 시나리오의 등장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어릴 적 설이같은 깊은 속내를 가지지 못했나”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이것도 핑계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조금은 참담한 심정이 되었다.
완독했을 때 마지막 설이의 모습이 그렇게 빛날 정도로 당차서 어느새 나는 설이는 실수 하나 없었던 완벽한 아이라고 생각해버린 것 같다. 아니란 것을 알기에 내가 놓친 건 무엇이냐, 그렇게 느낀 이유는 무엇이냐며 한 번 더 읽었다. 역시 설이가 상상하고 그렇게 기억하고 있던 것들이 항상 진실이 되지는 않았다.
가장 의지하고 있던 3명 모두 설이가 상상하던 사람이 아니었다것이 진실이다. 가장 완벽한 아빠이지 못했고, 아기를 구원한 것이 아니라 나락으로 빠뜨렸으며, 누군가는 멍청하기만 한 바보가 아니었다.
주인공도 여느 아이처럼 사람을 용서하는 방법을 배우고, 실수하기도 하고 때때로 오해하고 잘못 선택한 것도 있었다는 것, 설이도 머나먼 등장인물이 아니라 내 앞에 있었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작가는 등장인물 안에서 마음을 글로 전달하고 있구나. 완전히 다른 작가와 등장인물의 관계가 아니라 같은 시점으로 글을 쓰는구나.’라고 새로운 글쓰기 방법이 있음을 말이다.
‘나에게도 한 명의 작가가 내 안에서 이만큼 몰입할 수 있는 소설, 글을 쓸 수 있을까? 언젠가부터 기계적으로 쓰는 독후감들이 이 작가의 문장만큼 진실할 수 있을까?’